드디어 우승자가 되다

아직도 일이 이렇게 풀렸다는 걸 믿기가 힘듭니다. IEM 카토비체에 출전하러 갈 때만도 좋은 성적을 거둘 실력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지만, 우승까지 하리라고는 전혀 예상 못했습니다.

시작은 좋았습니다. 경력 사상 처음으로 IEM 카토비체 예선을 통과하여 본선 무대에 자리를 차지하였습니다. 꽤나 자신만만한 상태였지만, 예선을 통과했을 때의 기대감과 허풍은 오래 가지 못하고 곧 창피함과 실망으로 식어 버렸습니다. 저는 0승 3패로 대회를 시작해버렸고, 이렇게 되면 벌써 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는 여기까진가 보다,” 아니면 “나는 떨어질 사람인가 보다,” 같은 생각만이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이렇게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계속 열심히 경기하기는 정말로 힘듭니다. 다음 라운드로 진출할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제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밖에 없었습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경기에 임했습니다.

바로 이 때, 불가능이 현실로 이루어졌습니다..

다음 두 경기를 이기고 난 후, 우연찮게 조에서 3등 자리를 두고 비긴 네 명의 선수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네 명 중 단 한 명만 다음 라운드로 진출할 수 있었지만, 제가 반격을 시작한 다음 4연승을 만들었기 때문에 가장 좋은 승점을 얻어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포기하기 일보직전이었지만,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반전을 이끌어냈다는 사실이 다음 라운드 진출을 평소보다 훨씬 달콤하게 만들어 준 것 같습니다.

그날 밤 일정을 마치고 호텔로 되돌아가면서 내게 운이 따라주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운이 따라준다 해도 한계가 있을 것이었습니다. 24강에서 프로토스전을 지독하게 못했기 때문에, 제가 주성욱 선수를 넘어설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24강에서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해서 한편으로는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무 것도 잃을 게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경기를 시작하려 자리에 앉으며 주문을 외우듯 제 자신에게 읊조렸습니다. “편하게 하자, 편하게 하자.” 주말 내내 그 주문을 몇 번이나 외웠는지 알 수도 없지만, 어쨌든 효험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경기를 이기기 위해서는 과감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저는 올인으로 선제공격에 나섰습니다. 올인은 막혔지만, 주성욱 선수가 역공을 오다가 무리한 교전을 했을 때 그를 꺾을 수 있었습니다. 나머지 세트도 비슷하게 흘러갔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스코어는 3-0이 되었고 저는 8강행 티켓을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이토록 결정적으로 승리를 거두리라고는 절대 예상하지 못했지만, 주성욱 선수를 이겨 얻은 것이라고는 세랄 선수와 맞붙을 기회 뿐이었습니다. 사실 대회 높은 곳에서 세랄 선수를 만난다는 것 자체가 상당한 성과입니다. 지난 경기에 이어 이번 경기도 밑져야 본전인 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랄 선수는 처음 두어개 세트에서 저를 당황하게 만들었지만, 스코어가 앞서나가자 예전에 하던 버릇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세랄 선수의 이런 작전 변화가 실제로 제게 유리하게 돌아간 것은, 제가 세랄 선수의 평소 스타일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018년에 열린 한 대회에서 그를 만나게 되어 세랄 선수를 심도 있게 연구했던 것이, 그 때 유용하게 쓰였던 만큼 이번에도 잘 통했습니다. 세랄 선수가 블리즈컨 챔피언이라고는 하지만, 저는 무난한 저저전에 있어서는 세상 누구를 만나도 자신있습니다.

이 때 제가 세랄 선수에게 패배했더라면, 물론 딱히 기쁘지는 않았겠지만 제 성적에 만족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세랄 선수가 4강으로 가는 제 앞길을 더 이상 막지 않게 되자, 기대감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김준호 선수를 상대로는 꽤나 자신있었고, 대진표 반대쪽에서 올라온 선수들도 못 이길 상대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결승전이 점점 가까워짐과 함께 너무도 익숙한 압박감이 저를 누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12강때부터 하던 그대로, 마음을 편하게 먹고 당장 있는 경기에 집중하자고 다짐하였습니다.

김준호 선수와의 경기는 전날 주성욱 선수와의 경기만큼 빨리 끝났습니다. 단숨에 저는 11년 경력 동안의 통산 11번째 결승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중 하나를 제외하고 전부 패배하였고, 손아귀에 닿았던 우승을 놓쳐 버리는 고통을 다시 경험하기는 세상 어느 것보다도 싫었습니다.

김대엽 선수와의 결승전은 자신감 있게 시작했지만, 자신감 때문에 조금은 나태해지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김대엽 선수는 대회 전 래더에서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곧바로 2-0으로 앞서나가 버렸습니다. 바로 이 때, 예전 같았으면 회의감과 불안감이 저를 엄습했을 것입니다. 저번 결승의 기억, 또 그 전 결승의 기억이 머릿속을 맴돌며 저를 괴롭혔을 것입니다. 그럴 때는 결승 상대와 경기하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과거의 모든 실패를 대상으로 사투를 벌이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제 자신을 채찍질하여 경기에만 집중했습니다. 김대엽 선수는 폭주하듯 잘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는 비로소 상대를 인정하고 제가 가진 가장 배불리는 빌드를 꺼내들었습니다. 여기서부터 김대엽 선수는 적응하기 힘들어했습니다. 저는 다음 세 세트를 연달아 이겨 3-2로 역전을 만들어냈습니다. 김대엽 선수는 전세를 뒤집으려 6세트 때 올인을 시도했지만, 즉흥적인 플레이었기에 타이밍이 날카롭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 올인을 쉽게 막았고, 그리고는…

찰나의 순간, 아, 이제 5세트가 끝났고 아직 3-2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보니 함성지르는 관중들과 무대에서 솟아오르는 불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제서야 이게 현실이라는 것이 실감났습니다.

저는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제 주변 상황을 인지하는 동시에도, 꿈 속에서 걷고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사실이라는 것을 그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승을 쫓아 고군분투하던 수년 간의 세월 끝에, 그 동안 경험했던 모든 간절함과 좌절감 끝에, 저는 드디어 목적지에 도달한 것입니다.

드디어 저는 우승자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집니다. 우승에 대해 생각해 볼 시간이 조금 있었지만, 아무리 더 생각하더라도 그 순간 느꼈던 안도감과 기쁨을 표현할 말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IEM 카토비체에서의 우승은 제게 아주 큰 변화로 다가왔습니다. 이전에는 제가 쌓았던 준우승 경력이 모두 무의미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우승을 손에 넣은 지금은 제 커리어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됩니다. 얽혀있던 모든 한과 후회가 풀어지는 기분입니다. 이제는 과거가 그저 과거로 남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번 대회는 느낌이 있어, 이번이야말로 우승할지 몰라, 하고 생각했던 적이 몇 번이나 되었는지 모릅니다. 결국 이번에는 제 느낌이 맞아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저는 너무나도, 너무나도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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