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크래프트 너머의 삶

프로게이머 활동을 하면서 훌륭한 순간들을 너무도 많이 경험해서 가장 좋았던 순간을 하나로 뽑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프로 선수로서 걸음마를 뗄 무렵, 첫 대회의 예선을 통과했을 때의 기쁨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프로리그에 출전하여 네 차례 패배한 후 비로소 첫 승을 거뒀을 때 저를 휩싼 안도감도 마찬가지입니다.

케스파컵 우승을 했을 때 느꼈던 그 천하무적의 느낌은 아마 생이 다할 때까지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블리즈컨 결승에 올랐을 때의 그 주말은, 저를 연호해준 관중의 열기에 힘입어 평생 한 번 경험하기 힘들 멋진 순간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제가 스타크래프트를 좋아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도전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제가 스타크래프트를 좋아하는 것은 승리를 거뒀을 때의 성취감이 세상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랜 세월 프로게이머를 하면서 이룰 것은 거의 다 이루어 봤지만, 아직도 GSL이나 블리즈컨 같은 최고 티어의 대회에서 우승을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우승을 향한 해소할 수 없는 갈증이 저를 아직 채찍질하고 있습니다, 케스파컵 때 느꼈던 희열을 다시 손에 넣기 위한 그 도전이, 제가 넘어질때마다 다시 일어서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끝내 챔피언이 되었을 때에만 비로소 저는 미련없이 은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프로게이머를 하면 온갖 질문을 다 받게 됩니다. 저는 2018년의 실망스러운 성적에 대해서도, 수많은 준우승을 한 느낌이 어떤지도 질문받아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의외로 제게 자주 물어보는 것이 있는데, 제가 프로게이머를 하지 않았다면 지금 어떤 위치에 있을지 질문합니다.

이제 저는 12년 동안 스타크래프트를 전업으로 해왔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게임 말고 제게 특출난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영어를 좋아했으니 아마 영어를 공부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학교에 가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직장을 가고, 뭐 그랬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스타크래프트 선수인 soO가 아닌, 그저 어윤수라는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12년은 정말 긴 세월이어서, 제가 15세의 나이로 SK 텔레콤에 입단했던 시절과는 시대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런 대기업팀에 소속되어있다는 것은 제 삶에 많은 안정감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팀 소속 프로게이머로 남아서 게임에만 집중하면, 돈을 계속 벌고 은퇴 후 삶을 충분히 준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016년에 결국 팀이 해체되었을 때는 막막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마음 속에 정말로 걱정이 찾아들기 시작했다고 하겠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것만큼 미래가 멀리있지 않았다는 것을 한순간 깨달아 버린 것입니다.

은퇴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는 요즘은 슬픈 마음이 들지 않기가 어렵습니다. 프로게이머는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제 삶의 열정이었습니다.

12년 동안의 노력을 생각하면, 그리고 승리와 경쟁의 성취감이 갑자기 제게서 떠나간다는 생각을 하면, 은퇴가 저를 얼마나 힘들게 할지 깨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선수 생활을 해보지 않은 다른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은 — 아마도 생각하기 싫어하는 걸수도 있겠지요 — 프로게이머가 선수로서 은퇴한다고 해서 인생 전체가 멈추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제가 선수 생활의 경쟁과 끊임없는 도전을 즐긴다고 말씀드렸지만, 프로게이머를 하며 지칠 때도 역시나 많습니다. 2017년에는 모든 것이 자유롭고 수월하게 느껴졌었지만, 작년은 그런 순항과는 정말 거리가 멀었습니다. 들쭉날쭉한 성적을 거두며 작년 시즌을 시작한 후, 폼을 유지하려 고군분투하는 와중에도 개인적인 문제들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진이 빠지는 상황이었습니다. 은퇴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제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저를 북돋아주기 위해 최대한 도와주었습니다. 제가 지금 다시 마음을 다잡고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은 그들 덕분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목표인 우승만 해도, 그게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새해를 맞이한 만큼, 최후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어떤 노력도 아끼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은퇴하면 스타크래프트가 그리울 것입니다. 당연히 그리워할 수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인생에는 게임이 아니더라도 수많은 기회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가 은퇴한 후에는 아마 제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 있을 것입니다. 제가 삶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해보는 과정 말입니다.

그것이 직업이 되었든, 가정을 꾸리는 것이든, 아니면 또다른 무엇이 되었든, 만약 제가 프로게이머로서 노력했던 것만큼 열심히 하면 제게 좋은 일만이 있을 것을 확신합니다.

결국 제가 원하던 우승을 하지 못하더라도, 저는 프로게이머로서 길고 보람찬 커리어를 쌓아왔고 앞으로 나아가는데 필요한 돈도 많이 벌어 두었습니다. 앞날에 어려운 일도 있겠지만, 제가 헤쳐나가지 못할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프로게이머 이후에 찾아올 일들이 기대되는지 두려운지 제게 물어보신다면, 저는 또 다른 질문으로 반문하겠습니다. 저나 당신이나, 미래의 모습을 과연 누가 말할 수 있을까요? 저도 아는 것이라고는 희망을 갖는 것 뿐입니다.

미래는 두렵기 마련입니다. 미래는 불확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미래를 내다보는 제 마음은, 두려움보다는 기대에 더욱 차 있습니다.

Start the discussion

to comment